인프랩을 퇴사하며 혼자만의 생각을 주저리주저리 적어보려 합니다. 그냥 생각나는 것들만, 기억하고 싶은 것들만 적혀있을 확률이 굉장히 큽니다. 쓰다보니 꽤나 긴 글이 되었습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인프랩의 장점은 성장할 수 있는 회사라는 것이고 단점은 술 안주로 상사 욕을 할게 없다는 것입니다. 2022년 첫 회고로 퇴사 회고를 쓰는 저를 보며 마음껏 비웃어주시길 바랍니다.

인프랩 면접

저는 최초로 인프랩에서 FE, BE 면접을 둘 다 본 사람입니다. 그 이야기를 잠깐 해드리자면..
1차 기술 면접을 보러 면접장 안내를 받아서 기다리는 중 면접관 세분이 들어오셨습니다. 다들 너무 인상이 좋더군요. 하하호호 웃으면서 면접 전 아이스 브레이킹 시간을 보내는 중 뭔가 삐그덕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면접관 : 구로구에 사신다고 들었습니다.
나 : 네..? 저는.. 구로구에 안사는데요..?
면접관 : 엇.. 제가 잘못 본 것 같네요..!

이후 제출한 기술 과제를 잘 보았다고 말씀해주시며, 코드를 함께 보자고 제안해주셔서 함께 보던 중 살아생전 처음 보는 코드들이 있었습니다. 뭔가 잘못됨을 바로 직감했습니다.

나 : 어 .. 혹시 여기 백엔드 면접이 맞을까요?
면접관 : 네..? 여기 FE 면접인데.. 김XX씨 아니세요?
나 : 어.. 아니요? 저는 박민규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있던 곳은 FE 면접장이었습니다. 아이스 브레이킹만 무려 15분을 하고 나서 알게 되었고, 다시 제대로 된 BE 면접장을 안내받고 문을 열었을 때 갑자기 숨이 턱 막혔습니다.

본인이 사투리를 안쓴다고 생각하는 향로
머리띠를 쓴 후리

이런 인상을 가진 두 분이 앉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와 이게 진짜 백엔드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당연히 첫 인상과 일치하게 기술 면접에서 후드려 맞았습니다. 하지만 정말 최면에 걸린 듯 면접을 보고 난 뒤 이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것도 정말 간절하게요. 그 이유는 면접이 정말 재미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CS만 물어보는 면접은 재미가 없습니다. 누구든 외우기만 하면 대답할 수 있고, 검색만 하면 다 나오는 질문들을 외워서 면접을 보는게 너무 형식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본 면접은 달랐습니다. 제 경험에 대해 물어보고. 제 경험을 라이브로 듣고 즉석으로 질문을 합니다. 절대 미리 준비할 수 없는 질문들을요. 그 질문들은 정답이 없지만 고민이 필요합니다. 제가 겪었던 기술적 문제를 질문만 받음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협업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1시간 30분이 넘는 면접을 보고 나왔을 때 저의 부족한 점을 잘 알 수 있었고. 여기서 일한다면 어려운 기술적 과제들을 함께 고민하고 나의 부족한 점들을 잘 알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닝 크루거 효과

2021년 10월. 인프랩에 입사했을 때 저는 우매함의 봉우리 였습니다.
제가 겪는 이슈들을 언제든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감에 차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이슈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고. 해결하더라도 왜 발생했는지, 왜 이 방법으로 해결했는지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무지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절망의 계곡으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절망의 계곡에서 깨달음의 오르막으로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훌륭한 동료 덕이었습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인프런에 오픈되어 있는 수습 회고를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ClickUp

doc.clickup.com

인간적인 회사

인프랩 문화는 인간적입니다. 어쩌면 따뜻하다라는 말이 맞을 수도 있겠습니다. 띄워주려는 목적이 아니라 정말 따뜻하고 인간적인 문화를 가진 회사입니다. 하지만 입사 후 딱 한 가지 동의할 수 없는 문화가 있었는데요.

간혹 여러 사람들이 참여하다 보면 다양한 의견 속에 길을 잃을 때가 있어요.
정체될 때 리더가 방향을 정합니다. 다시 빠르게, 하나로 나아갑니다.

여러 의견 속 길을 일을 때 일단 리더가 결정을 한다는 조직문화를 보고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일반적인 회사에서 리더의 선택은 실무와 거리가 멀거나, 타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의 예시로 군대에서 병사 한 명이 외박을 나와 사고를 친 경우 리더는 사단 전체 외박 금지로 구성원들에게 화답합니다. 이러한 윗선의 주먹구구식 결정에 구성원들만 고통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인프랩 문화에서 "설득 없이 리더가 방향을 정하는 것"은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실제 인프랩에서 경영진 마음대로 결정하는 사안들이 많았습니다. CEO 마음대로 크리스마스 선물로 에어팟을 집에 보내준다던가,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때 어버이날 선물로 부모님 집에 백화점 상품권을 허락 없이 보낸다던가 경험해보니 꽤나 괜찮은 문화였습니다.
(투자자님들 여기에요!! 여기!! 잡아가세요!!!)

점심먹고 졸릴 때 쯤 샴페인&맥주 때리자는 CEO
어버이날 선물로 비트코인 대신 인프코인을 선물함
구성원별로 직접 작성한 편지와 에어팟 소매넣기 당했을 때

실제 업무에서도 리더의 선택을 따라서 좋은 점들만 겪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뢰가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모든 선택은 트레이드오프가 있습니다. 하나의 예시로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기 위해 자동차와 오토바이 중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자동차는 안전하지만 교통 체증이 있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오토바이는 위험하지만 교통 체증이 있을 때 차 사이로 빨리 지나갈 수 있습니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리더는 오토바이를 선택했지만 진동이 시끄럽거나 비를 맞으면서 가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는 구성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빨리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자동차로 교통 체증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오토바이의 장점을 모르겠다고 불만을 품는 구성원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차간 주행은 불법이다.

따라서 제가 내린 결론은 "리더는 무엇을 하든 욕먹는다." 입니다. 구성원 전체가 납득할 수 있는 결정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리더의 입장에서 1명이 행복하고 10명이 불행한 것과 10명이 행복하고 1명이 불행한 논제가 있다면 후자를 결정할 것입니다. 리더는 상황에 따라 전자를 선택해야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불만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선택지입니다. 따라서 구성원으로서 할 수 있는 스탠스는 리더가 지금까지 이 회사, 팀을 이끌어왔으니 분명 의중이 있을 것이라 믿고 따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동의할 수 없는 결정들이 Top-Down으로 내려온다면 일단 따르면서 신뢰를 산 뒤 결정적일 때 그 신뢰를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향로

연예인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습니다. 저는 향로를 개발바닥에서 하하호호 즐겁게 이야기하는 모습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세계최초 예능 지향 데브 엔터테이먼트 토크쇼 향로~

개발바닥 속 향로는 라면으로 친다면 너구리 순한 맛입니다. 재미있고 유쾌하고 굉장히 귀여운 느낌입니다. 하지만 실제 업무 속 향로는 정말 멋있고 카리스마 있습니다. 또한 구성원이 동의하지 못한다면 CTO임에도 불구하고 구성원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선택을 해야할 때 기술적으로만 판단하지 않고 비즈니스적으로, 팀적으로, 성능적으로 전부 고려해서 의견을 제시합니다. "와 이거까지 생각할 수 있다고?" 놀랄 때가 많았습니다. (물론 제가 부족한 것입니다.)

(앞머리 만지작 만지작) 음 .. 진행시켜 ..

(정보) 위 사진 두 개 다 이경영씨 사진임.
때로는 엄청난 통찰력으로 "혹시 이런 케이스는 고려됐나요?" 라는 질문만으로 혼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향로와 기술 관련된 건전한 논쟁을 할 때 자아성찰을 할 수 있었고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무엇이 부족한지 메타인지가 가능했습니다. 이런 느낌이 마치 회초리를 맞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향초리(향로의 회초리) 라는 유행어를 최초로 만들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무조건 향로 주장대로 기술적 선택이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향로도 주니어 주장에 설득되어 본인의 주장이 틀렸음을 인정하기도 합니다. 그런 모습마저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주니어에게 설득되는 CTO라니..
또한 향로가 개발팀에게 쏟아내는 콘텐츠들은 정말 많은 기술적 성장과 자극을 줍니다. 하드 스킬부터 소프트 스킬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좋은 아티클과 최신 핫이슈들을 쏟아냅니다. 더욱 놀라운 건 회사의 엄청난 업무량을 쳐내면서 개발팀을 위해 콘텐츠도 쏟아내고, 개발바닥도 하고, 개인 기술 블로그도 작성하고 저렇게 수많은 일을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이 글을 보신다면 향로 콘텐츠 유료 구독 상품을 만들어주세요...
사실 옆에서 지켜만 봐도 배울 점이 많은 리더인데요. 실제로 아침 8시에 출근해도 향로는 회사에서 공부를 하고 있고, 아침 7시에 출근해도 이미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예전 백기선님 유튜브에서 본 내용이 떠오르는데요.

저는 출근 전 아침 6시 반에 운동을 가는데요.
그 시간에 운동을 하면 같이 MS에 다니는 개인적으로 아는 분을 매일 헬스장에서 만나요.
저는 그냥 그분의 모습을 보면서 배우는 거에요.
제가 꼭 그분께 뭔가를 물어보거나 겪지 않아도,
그냥 그 사람이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거기서 배우는 거예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보려면 그 시간에 일어나서 가야 돼요.
영상 링크

향로와 마지막 퇴사 티타임에서 정말 친형에게 들을 수 있을 법한 피드백과 인생의 조언을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다음 회사에서도 더 잘하는 차밍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피드백을 주셨습니다. 저는 향로에게 항상 받기만 하고 주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찔끔ㅠ) 제가 리더가 된다면 향로와 같은 리더가 되고 싶습니다. 정말 진심으로요.
정말 이 외에 미담, 일화들이 정말 많지만 이곳에 다 쓰기에는 벅찹니다.
함께 일해본 사람만이 온전한 제 말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Next Step

사실 저는 욕심쟁이입니다. 이렇게 좋은 회사와 동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성장하고 더 높이 올라가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지구에서 유일하게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동물은 인간이라는 말이 어쩌면 저 때문에 생긴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성장이 가능한 곳인데 갈까?"라는 고민에 있어서 이번 선택은 "간다"를 골랐습니다. 이번 선택으로 향후 몇년간 저에게 선택권은 없습니다. 추가적으로 하고싶은 이야기는 성장에 따른 보상은 스타트업의 꽃이라고 합니다. 하나의 예시로 스톡옵션이 있는데요. 현재의 시간을 지렛대 삼아 미래의 이익률을 극대화시키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당장 세금 1억을 내야 하는 사람, 빚 1억을 갚아야 하는 사람도 레버리지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장 눈앞의 이익만을 쫓아가는 제 자신이 마치 그리디 알고리즘 같기도 하네요. 그리디 알고리즘은 이름대로 탐욕의 알고리즘입니다. 지금 당장의 최선의 선택지만을 골라가며 해를 도출해나가는 방법을 사용하는 알고리즘인데요. 저의 바람은 두 가지 선택지 전부 다 최적의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동료들과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